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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의 독립혁명과 관계된 세금
    세금 신고, 세법의 역사, 납세 의무 원칙 2024. 4. 23. 08:23

    미국의 독립혁명과 관계된 세금

    미국의 독립혁명과 관계된 세금
    미국의 독립혁명과 관계된 세금

    미국의 독립 혁명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미국의 독립혁명을 살펴보기 이전에 우리는 독립혁명의 발발의 계기가 된 영국과 프랑스의 7년 전쟁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콜롬버스는 스페인 여왕의 후원에 힘입어 인도를 발견하기 위하여 원정을 떠납니다. 그러나 그가 당도한 곳은 인도가 아니라 북미 대륙 즉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게 됩니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이곳이 인도인 것으로 착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콜럼버스가 죽을 때까지 이곳을 인도로 생각하고 죽게 됩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발견되었던 원주민을 우리는 지금도 인디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동부 대륙에 도착한 콜럼버스는 군대를 이끌고 지금 현재 미국이라고 불리는 북미 대륙 전역에 진출을 하게 됩니다. 콜롬버스에 의해 개발된 이 항로를 따라서 영국과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등은 식민지를 개척하게 되고 1차적으로 영국은 지금 현재의 미국의 동부 쪽에 정착을 하게 됩니다. 동부에 정착을 하면서 영국은 이름을 명명하게 되죠. '이곳은 영국의 욕과 비슷한 지역이다', 그래서 뉴욕으로 칭하게 되고 '이곳은 우리 영국의 햄프셔 지역과 비슷한 지역이다', 그래서 '뉴햄프셔'로 칭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일대를 아직도 뉴잉글랜드라고 우리는 칭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서 프랑스 군은 지금 현재 미국의 중부 내륙지역으로 진출을 하게 됩니다. 현재 캐나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중부내륙지역을 진출한 프랑스는 이 지역을 루이 14세의 이름을 따서 루이지애나라고 칭하게 됩니다. 같은 대륙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같은 식민지를 개척하게 되면서 두 나라 간에는 마찰이 발생하게 되고 급기야 1756년부터 1763년 사이에 영국과 프랑스의 7년 전쟁이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와 영국의 전쟁으로 인한 미국의 탄생

    프랑스와 영국의 7년 전쟁이 시작되고 7년 전쟁을 통해 북아메리카 대륙의 프랑스 영토 대부분이 영국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전쟁의 승리는 영국군이 가져갔기 때문입니다. 영국은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부채를 식민지 조세로 전가하면서 식민지인들의 반발을 겪게 되었습니다. 확장된 식민지에 대한 통치와 관련하여서도 식민지인들과 굉장한 마찰을 빚게 됩니다. 하지만 이에 불구하고 영국은 이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하여 식민지국에 굉장히 높은 세금을 부과하게 됩니다. 1764년 아메리카에서 영국으로 수출되는 설탕 포도주 커피 비단 등의 물품에 관세를 물리고자 하는 이른바 설탕 세법이 제정되면서 식민지 국의 반발은 크게 이르게 됩니다. 식민지 사람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이듬해 1765년 인지세법을 만들어 더욱더 가혹한 수탈을 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이 법은 북미 식민지인들이 신문, 토지문서, 대학 졸업장 광고지 등 각종 공공문서에 인지를 붙이도록 하였고 이에 식민지인들은 굉장한 저항을 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사실 인지 가격은 그리 비싼 것이 아니었지만 세금을 거두어 받을 권리를 가진 것이 영국정부인지 아닌지 식민지 의회인지 하는 문제로 아메리카 대륙 전체의 분노와 반항을 자아내게 됩니다. 대표 없이 과세 없다 위의 말은 영국의 인지세법에 대응한 식민지인들의 슬로건으로 정부가 국민의 대표기관인 의회에서 승인을 얻지 않고서는 과세를 할 수 없다는 원칙을 뜻하고 있는데요. 이 슬로건을 내걸은 아메리카 대륙의 사람들은 식민지에 대한 과세권은 오직 식민지 의회에만 있다는 결의안을 채택하고 영국 상품 불매운동까지 벌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인지세법은 곧 폐기되기에 이릅니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처음 도입된 인지세법은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 본토에서도 실시되고 있던 당시 보편화됐던 제도였습니다. 또한 영국의 인지세율이 미국보다 현저히 높았다는 점에서 식민지 미국에게만 불평등하게 적용된 과세 제도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릅니다. 그렇다면 미국인들은 무엇 때문에 인지세법을 격렬히 반대했던 것일까요?

    인지세법 반대 이유

    인지세법이 시행되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계층은 대부분 상인이나 출판업자와 같은 부유층이었습니다. 이들은 인지세법이 미국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영국 의회에 의해 일방적으로 제정되고 강제된 제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인들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부당한 조치라고 생각하고 극심한 반발을 하기에 이릅니다. 심지어 대표 없는 과세는 부당하다는 원칙하에 영국 국왕에게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하였습니다. 즉 미국 대표가 영국 의회에 참석하지 않으므로 미국 내의 인지세법을 폐기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인지세법을 둘러싸고 극명한 입장 차이가 발생하자 영국 제품에 대한 불매 운동이 미국 전역에 번져나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정부는 여기에 포기하지 않고 영국에서 수출하고 식민지에서 수입하는 유리, 종이, 잉크, 페인트, 납, 차 같은 상품에 세금을 부과하는 이른바 타운젠드 세법을 제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식민지인들은 영국의 번영을 위해 식민지에 착취당하고 있다며 영국의 모든 과세에 반대를 합니다. 이렇게 항의가 거세지자 영국은 결국 군대를 파견하는데 이것이 오히려 식민지 사람들의 분노를 돋우게 되고 1770년 영국 의회는 전략적으로 한발 물러서기로 하고 타운젠드 법을 취소합니다. 하지만 이때 영국정부는 하나의 상품을 제외하게 됩니다. 재밌게도 이때 제외된 차가 미국독립전쟁의 불씨를 제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차에 대한 관세로 인해 미국에서의 차 가격이 상승하자 밀수가 성행하였고, 이에 따라 차 무역을 담당하던 영국의 동인도 회사는 경영난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영국정부는 자국의 상류층과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동인도회사의 위험을 모른 채 할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동인도회사의 수출관세를 면제해 주고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차 거래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하는 관세법이 통과되었습니다. 이 덕분에 동인도 회사는 아주 싼값에 차를 판매할 수 있게 된 반면 미국의 밀수업자들은 도산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보스턴 차 사건과 미국 독립

    1773년 12월 16일 결국 사건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자유의 아들들이 중심이 된 일당의 무리가 보스턴 항구의 정박 중이던 동인도 회사 소속의 선박에 올라 300여 상자에 가득 담긴 수십 톤의 차를 바다에 던져버린 것입니다. 이른바 보스턴 차 사건이 발발하게 되었습니다. 이 보스턴 차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미국 독립을 촉발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통치국 영국과 식민지 미국 사이에 무력충돌이 본격화되었고 이후 양국 간 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의 완전한 독립으로까지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보스턴 차 사건으로 인해 1774년 3월 영국 의회에서는 보스턴 항구 조례로 9750파운드를 물어내지 않으면 해군으로 공세하는 법을 제정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대책 마련을 위해 식민지 대표들로 구성된 대륙회의가 개최되고 식민지 대표들은 마침내 필라델피아에 모여 영국과의 전쟁을 결의하고 식민지 연합군을 조직하기로 결정하는 한편 조지 워싱턴을 연합군 총사령관에 임명하게 됩니다. 이로써 1775년 렉싱턴 전투를 시작으로 1781년 욕타운 전투에서 영국으로부터 항복을 받기까지 미국의 독립전쟁이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1년 뒤인 1776년 7월 4일 식민지 대표들은 다시 필라델피아에 모여 토마스 제퍼슨이 기초한 독립선언서를 만장일치로 채택하고 미국의 독립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토대로 우리가 고민을 해보면 애당초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과중하게 부과된 세금으로 인해서 그 세금의 난폭함을 견뎌낼 수 없어서 결국엔 독립을 선택하기로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근대사회에서 중요한 사건인 미국의 독립혁명의 발발 역시 과중하게 부과된 세금 때문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다시 한번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미국의 독립혁명과 세금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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